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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오늘의 이슈 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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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웃 작성일20-12-13 04:08 조회180회 댓글0건 주소복사  내용복사  즐겨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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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랜선 동남아⑤ 스페인 갤리언 무역 동남아 변화의 시기인 16세기포르투갈·스페인이 동방 진출 남아메리카-필리핀 이은 항로개척마닐라가 동남아 무역 대항으로 멕시코 은화와 중 푸젠상인 만남교회도 갤리언무역 고리대 사업지금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식재료들이 사실 외부에서 수입된 것들임을 깨닫는 경우가 가끔 있다. 놀랍게도 그 가운데 상당수는 수백년에 걸친 마닐라-멕시코 사이 경제 교류의 산물이다. 16세기 말 이후 옥수수, 감자, 토마토, 파인애플, 피망, 땅콩 등의 식재료가 당시 멕시코에서 필리핀 마닐라를 거쳐 동남아와 동북아로 퍼졌다. 또한 마닐라를 비롯한 필리핀을 여행해본 이들 가운데 눈썰미 있는 능숙한 여행객들은 그들의 문화에 미묘하게 스며든 멕시코, 혹은 라틴적 요소를 포착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16세기 중반 이후 수백년 동안 스페인의 식민지로 광대한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긴밀하게 교류한 두 지역 간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 연결고리는 바로 은(銀)이다.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등장동남아시아가 고대 시기부터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상업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 특유의 지리적 위치 때문인데, 특히 외부 세력이 바닷길을 통해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로 향할 때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관문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동남아시아는 인도와 중국 문명의 교차점이었고, 이슬람 상인들이 동북아로 향하는 관문이었으며, 포르투갈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국가들이 동북아시아로 건너가기 전 먼저 점령하고보험비교식민화한 지역이기도 하다. 또한 21세기 현재 서아시아의 석유가 동북아로 향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 역시 여전히 믈라카해협이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큰 물동량을 자랑하는 무역 회랑 가운데 하나이고, 싱가포르 번영의 이유이기도 하다.그러나 동남아시아의 경제적 중요성은 단순히 지리적 요인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현지에서 생산되는 특산품 역시 전세계의 상인들을 불러 모으는 요소였다.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쌀과 목재, 자바 지역을 비롯한 해양부 동남아시아의 쌀과 주석, 해산물 등은 중국 상인들과의 오랜 무역을 가능하게 해준 효자상품이었다. 거기에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 남아시아운전자보험대륙의 면화와 후추, 계피 등의 향신료, 서아시아의 침향까지 거래되면서 15, 16, 17세기 동남아시아는 말레이, 자바, 베트남 짬족(참족) 등의 현지 상인과 중국, 아랍, 인도, 유럽 등의 외부 상인들이 경쟁하고 협력하는 국제시장(emporium)을 형성하였다. 그중 서아시아의 이슬람 상인들과 유럽 상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었던 상품은 다른 무엇도 아닌, 검은 황금(Black Gold)이라 불리던 동남아시아 말루쿠(몰루카)산 정향, 육두구, 메이스 등의 향신료 3대장이다.16세기 동남아시아는 변화의 시기였다. 해양부 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고, 11세기부터 시작된아파트화재보험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소승불교 전환이 베트남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역에서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8~9세기 이후 이슬람 상인들의 동남아시아 및 동북아시아 진출로 시작된 해양 실크로드에 새로운 플레이어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바로 유럽 이베리아반도의 두 나라, 포르투갈과 스페인이다.유럽의 두 국가가 동방으로 진출하게 된 계기는 명백하다. 1511년 포르투갈의 함대가 믈라카를 무력으로 점령한 이후의 기록이 그 목적을 잘 보여준다.“믈라카는 무어인(Moor·무슬림)들이 매년 서아시아로 가져오는 모든 향신료와 약재의 집산지다. 카이로와 메카는 완전히 망할 것이고, 베네치아의 상인들은 우리 포르투갈을 통해서만 향신료를 구할 수 있을 것이다.”거의 천년에 가까운 시기 동안 이슬람인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던 해상 실크로드 속 최고의 상품은 남아시아 및 동남아산 향신료였고, 같은 시기 중세 유럽 상류층들의 입맛은 이 향신료에 매혹당해 있었다. 문제는 이 향신료가 이슬람 상인들과 베네치아 상인들 사이의 독점공급을 통해서만 지중해로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슬람인들은 이러한 향신료의 산지를 유럽인들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설사 유럽인들이 짐작한다 하더라도 막연하게 그들이 인도라고 뭉뚱그려 인식하는 동방의 어느 지역이라고만 알고 있었을 뿐이었다. 게다가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 동방과 유럽의 길목을 틀어쥐고 있던 강대한 이슬람 세력을 뚫고 건너갈 방법도보험비교없었다. 무엇보다 향신료는 유통경로가 길고, 독점공급이었던 관계로 그 가격은 같은 무게의 황금에 비할 정도로 비쌌다. 15세기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탐험가들이 왕족이나 귀족의 후원을 받아 끊임없이 동방으로 향하는 바닷길을 탐한 것에는, 더 이상은 금보다 비싼 돈을 주고 이슬람 상인들의 배만 불려주기 싫다는 이유도 있었다.그 노력이 결국 열매를 맺어 1492년 스페인의 후원을 받은 콜럼버스의 배가 대서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닿았고, 1498년 포르투갈 왕의 후원을 받은 바스쿠 다가마의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해암보험비갱신형아프리카 대륙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 서부 해안 캘리컷에 도착하는 항로를 발견한다. 그리고 1521년 포르투갈인이지만 스페인의 후원을 받은 마젤란이 꾸린 함대가 아메리카 대륙을 지나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세부섬에 도착하였다. 마젤란은 세부에서 사망하지만, 그가 꾸린 함대의 동료들은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를 지나 희망봉을 통해 이베리아반도에 도착함으로써 지구를 한 바퀴 돌게 된다. 이와 같은 대항해시대의 개막과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이슬람 상인들의 독점을 벗어난 유럽인들의 동방진출로가 열린 것이다.멕시코에서 필리핀으로 온 은화태평양 항로를 통해 아메리카 대륙과 필리핀을 연결할 수 있음을 알게 된 스페인은 지금의 멕시코 지역에 대한 식민지배를 완료하고 1571년 필리핀 루손섬의 마닐라를 점령하였다. 이 당시 마닐라는 믈라카 못지않은 동남아시아 무역의 대항(大港)으로 중국 상인, 동남아 현지 상인, 인도 상인, 이슬람 상인들이 모여 국제시장을 형성하고 있었다. 마닐라를 점령하고 정치적 지배자로 이들 다국적 상인들을 상대하게 된 스페인의 상인들이 동방의 귀중품을 구입하기 위해 지불한 화폐가 바로 은화였다. 포르투갈의 경우 반대급부로 지급할 만한 본국의 물품이 없어 주로 아시아 지역내 중개교류를 통한 차익으로 무역 네트워크를 유지한 반면, 스페인의 행운은 그들이 점령한 멕시코와 페루에 수백년을 써도 마르지 않을 대량의 은광이 매장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멕시코 현지인들이 아스테카(아즈텍) 문명의 지도자들에게 은을 대량으로 공물로 바치는 것을 목격한 스페인인들은 이 은광을 점령하고 본격적으로 채굴하여 스페인 은화를 대량으로 주조하기 시작한다. 주조된 은화는 멕시코의 아카풀코를 출발해 그대로역류성식도염치료태평양을 건너 마닐라로 옮겨지는데, 마닐라에는 대량의 은화를 감당해줄 또 다른 상인집단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당시 명(明)대 해금(海禁)을 뚫고 밀수를 하러 온 푸젠(福建)의 상인들이었다.16, 17세기 중국 명대의 경제는 송대에 비해 더욱 그 규모가 거대해졌고, 그에 따라 국가에 대한 세금 납부 및 국내 상업거래를 위해서는 기존 동전이 아닌 더 높은 단위의 화폐가 필요하게 된다. 금보다는 흔하지만, 동보다는 귀한 귀금속인 은이 주요 화폐로 활용되는데, 당시 명 조정은 모든 세금을 은으로 받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은을 통한 세금 납부는 이후 청대에도 지정은제(地丁銀制)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이어져 16세기 이후 수백년 동안 중국은 전세계로부터 끊임없이 은을 흡수한다. 영락제 말부터 명대의 대외정책은 명백히 해금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일찍부터 바다를 통한 무역거래를 주요 수입원으로 하고 있던 푸젠의 상인들은 해금을 무시하고 밀수에 몰두하는데, 그 주요 거래처가 바로 마닐라였다. 스페인 상인들이 가지고 오는 대량의 은화 공급은 중국 대륙의 은 수요와 만나 막대한 부를 푸젠 상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1700년대 말 마닐라 전체 인구 4만2천명 가운데 1만5천명이 중국계 상인 및 기술자, 노동자 그룹이었을 정도였다.정크선을 타고 남중국해를 건너오는 푸젠의 상인들과 갤리언선을 타고 태평양을 왕복하는 스페인비발디파크 스키강습상인들은 마닐라에서 조우하였고, 은화를 매개로 상업거래를 진행하였다. 이른바 갤리언 무역이다. 1748년 스페인 갤리언 무역의 항로를 그린 해도를 보면, 크게 세 개의 코스가 있다. 하나는 마닐라에서 아카풀코로 가는 항로이고, 또 다른 코스는 아카풀코에서 괌을 거쳐 세부로 들어오는 항로다. 마지막 코스는 아카풀코에서 바로 중국으로 향하는 항로인데, 마카오로 향하는 항로로 추정된다.또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교회의 역할이다. 스페인이 마닐라를 점령한 이후 가장 먼저 한 것은 중심 지역을 성벽으로 둘러싼 요새(fort)로 건설하는 것과 각지에 교회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요새를 사이에 두고 배가 정박하기 쉬운 곳인 비논도(Binondo) 지역에는 공식적으로 중국인 마을을 조성해 주었다. 현존김해출장안마가장 오래된 차이나타운으로 불린다. 무엇보다 교회의 역할이 중요했는데, 교회는 종교를 통한 현지인 지배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당시 스페인 상인들의 갤리언 무역에서 고리대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20~30%의 높은 이율로 은화를 스페인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그들이 동방의 물품을 싣고 태평양을 왕복하여 아카풀코에서 물품에 대한 대금으로 은화를 잔뜩 가지고 오면 이득을 취하는 구조였는데, 이는 태평양 항로가 전형적인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사업이었기 때문이다.태평양 항로는 그리 안전한 항로가 아니었다. 항로에 나섰다가 달아나거나 난파될 수도 있었고, 해적을 만나면 속수무책으로 털리기도 하는 무법의 항로였다. 실제 이러한 장거리의 항로가 가지는 리스크를 줄이고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유럽의 상인들이 고안한 제도가 동인도회사로 대표되는 주식회사와 보험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고리대업을 병행한 이유는 일단 한번 항로가 성공하면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는 거래였기 때문이었다.결과적으로 이 루트와 제도를 통해 대량의 은화가 수백년 동안 중국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데, 이 은화가 명청 시기 중화제국의 번영을 이끈 핵심 요소다. 많은수원중고차학자들이 세계 경제체제의 시작으로 이러한 갤리언 무역을 꼽는 것은 바로 서로 다른 문명 사이의 연결성 때문이다. 청말 시기, 심지어 중화민국 초기까지 17, 18세기 스페인이 멕시코에서 주조한 은화가 유통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종류도 다양하여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은화, 당시 왕의 두상이 새겨진 은화 등 다양했고, 청말과코워크중화민국의 권력자들 역시 이러한 스페인 은화를 모방하여 둥근 은화를 주조하기 시작한다. 중국의 화폐 단위인 위안(元), 일본의 엔(円), 한국의 원(圓)이 발음은 다르지만 모두 둥글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 역시 바로 이 스페인 은화의 모양으로부터 시작한다. 16세기 주조된 스페인 은화는 이후 전세계 은화 및 동전의 표준이 되었다.갤리언 무역은 19세기 멕시코의 독립으로 끝이 나지만, 독립한 멕시코가 자체적으로 주조하고 발행한 멕시코 은화는 여전히 마닐라를 거쳐 중국으로 공급되고 있었다. 멕시코 은화를 매개로 한 스페인의 갤리언 무역은 수백년 동안의 마닐라-멕시코 교류를 이끌었고, 무역은 자연스레 경제적 교류뿐 아니라 인적 교류, 문화적 교류로 이어졌다. 이것이 필리핀의 문화가 라틴적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는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대량으로 들어온 은화는 중국으로 향할 뿐 아니라 일부는 동남아시아로 흘러 들어가 지역 경제에 일시적으로 영향을 끼치지만, 제한적이었던데다 얼마 뒤 네덜란드가 진출하면서 큰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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