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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희 시의원 인터뷰 내용

페이지 정보

작성자 안혜림 작성일18-01-17 20:01 조회187회 댓글2건 내용복사  즐겨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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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76년에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시고 감옥에 가게 되고, 끝내 학교에서 제적당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그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젊은 시절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등..

- 1976년에 서울농대 원예과에 입학하였는데, 입학할 때에는 제가 농촌 출신이니까 농대를 나와서 우리 농촌과 농민들을 잘 살게 하자는 막연하고 어슬픈 꿈을 꾸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입학했을 1976년 3월은 전 해인 1975년에 김상진선배님 사건으로 인해 농해의 생운동 역량이 많이 파괴되고 난 뒤였는데, 그래도 선배님들이 남아서 한얼, 농사단, 농연(농업문제연구회), 개척농사회 등의 써클을 통해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그 때 고등학교 선배의 권유로 개척농사회에 가입하여 한국현대사와 농업,농촌문제 등을 학습하면서 고등학교까지와는 다른 현실에 대한 의식이 깨어났다고 기억합니다. 특히 방학때의 농촌활동과 집단숙식과 집중학습 등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크게 깨우치게 하였고, 점차 학생운동에 나서게 되었던 계기였지요. 그랬다가 1976년 1학기의 어느 날(5월로 기억함, 자료를 찾으면 나올겁니다.)에 75학번 선배들(이병호, 권오훈, 신언관 선배)이 수원 농대캠퍼스에서 반유신, 반박정희정부시위를 시작하였고, 그 때 선배들의 지휘에 따라 학우들을 선동하고 모으는 행동대 역할을 했다가 경찰이 찍은 사진 등의 수사결과 발각나서 무기정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운없이(?) 그 시기에 일어났던 서울 종로에서의 서울지역 대학 연합시위에서 나온 유인물을 기숙사와 학교근처 농대생들 하숙집 등에서 돌려보고 하던 중 어느 학생이 감격해서 부산대학교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산대학교 학과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당시의 현실로서는 서울대에서 온 편지가 검열당할 수 밖에 없었고, 당연히 부산대에서부터 거꾸로 추적된 소위 ‘서울농대 편지사건’ 의 수사에 걸려 책임자로 검거되었지요. 당시에 이렇다할 마음의 준비없이 검거되었던 숫자가 꽤 되었던(10명 이상) 후배학우들은 처음에는 모조리 수원경찰서에 잡혀갔다가 한 달 여쯤 고생하고는 훈방으로부터 유기정학 등의 피해를 입었지요. 뒤에 저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 재판을 받아서(박재순, 이주영후배입니다.) 저 외의 두 사람은 재판이 진행된 약 6개월을 수원교도소, 영등포교도소등을 끌려다니면서 수감생활을 한 끝에 당시 대통령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징역1년에 집행유예를 받았고, 저는 1년 징역형을 확정받았지요.
학교에서는 우리 세 사람을 다 제적시켰다가 뒤에 두 사람은 복학시켰습니다. (박재순후배는 임산가공학과를 졸업하였고 현재는 청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주영후배는 축산과를 졸업하여 고향 충북 오창에서 농장을 경영하다가 안타깝게도 병을 얻어 2014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저는 1983년에 복학 연락을 학교로부터 받았지만 지역활동하느라 복학을 안했으며 뒤에 2006년에 명예졸업을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학생시절의 민주화운동과 구속수감, 제적이 제 인생의 좌표와 운명을 결정한 것이지요. 이후 40여 년간 하는 일은 변하더라도 줄곧 우리사회의 민주화라는 길을 계속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정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 있는 행동’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정신이 있어야 제대로 된 행동이 있겠지만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행동이지요. (상당 경우 정신없이 이루어진 행동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수도 있지요.)정신 내지 생각은 행동으로 나타나지않으면 현실에서는 미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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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교에서 제적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셨다고 하셨지요. 어떤 계기로 어떤 농사를 지으셨는지.. 그리고 농사일과 함께 지역 단체 일을 병행하셨을 텐데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 농대에 들어갈 때부터 고향인 농촌을 생각한 마음이 있고, 개척농사회라는 써클의 이념 중의 하나가 농업을 실천하는 부분이 있은 데다가 만 2년6개월 정도이지만 원예학과에서 공부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속으로’ 라는 뜻으로 1980년부터 1983년까지 고향 김해 농촌(김해시 주촌면 내삼리)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논(벼)농사, 밭농사, 축산도 조금씩 하는 식으로 하였는데, 처음에는 서투르기만 한 농사일로 주위의 우스개가 되었는데, 마음을 다잡고 3년간 하니 상일꾼(일을 능숙히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3년간의 농사일은 개인적으로 농사에 종사하여 남들같이 일을 해내는 경험은 되었지만 김해지역의 농업 농촌사회에 정착하거나 농민의 권익을 위한 운동을 하는 선에는 못 미쳤습니다. 그리고 당시 부산지역에서의 시민운동, 재야운동인 양서조합과 부산민주시민협의회(1983년 송기인, 노무현, 문재인변호사 등이 창립주역)에서 하는 활동에 가담하여 부산을 자주 가면서 김해의 부모님과 사는 집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이때 부산에서의 1983년은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중심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조금씩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저는 이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활동에 참여하여 부산에 자주 가면서 김해에서는 후배들과 함께 ‘김해대학생연합학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김해지역의 문화를 위해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하나도 없던 도서관을 건립하자, 유신때 중단된 지역 축제인 가락문화제를 부활시키자 등의 문화운동을 시민들 속에서 전개하여 수백여 명의 대학생들이 캠페인을 벌였고, 여기서 모인 힘을 가지고 ‘김해의 미래를 위한 시민토론회’를 벌여서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수백명 규모의 행사를 벌여 김해경찰서 정보과 직원들을 긴장시켰던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때 김해대학생들이라는 후배들 속에서 학생 신분이 나닌 저는 이른바 ‘자문위원’이라는 직책으로 후배들과 함게 활동하여 소위 반정부운동하다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잘려나온 사람도 이렇게 지역에서 대중적인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때의 성과가 사회적으로는 도서관의 건립, 가락문화제의 부활 등이 있었지만 저 개인으로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중적인 활동을 전개한 소증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랬다가 6월 항쟁의 시기가 된 거지요. 전두환독재가 점차 발악적인 상황으로 가서 1987년이 되자 부산, 창원, 마산 등에서 6월항쟁의 깃발이 나부겼능 때 저는 6월 항쟁의 부산 지도부인 민주헌법국민운동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 (위원장 노무현)이 되어서 부산의 민주화투쟁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때 김해에서의 민주화시위는 인제대학교 총학생회가 이끈 학생들이 선도적으로 나섰는데 여기에도 동참하는 등 저의 당시 활동의 주무대는 부산이었지만 김해지역의 상황도 챙기고 동참하였습니다.
   
6월 항쟁 이후 저는 달라진 지형의 김해를 생각하여 김해지역에 주력하여 김해지역 민주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과 김해민주청년회장으로 활동하여 지역민주화에 전념하였습니다. 각종 집회의 진행과 참여, 대외교섭 등으로 바빴던 시기인 1991년 초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의원께서 고향 김해의 민주당 깃발을 저에게 꽂으라고 하신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활동했던 분들과 의논한 결과 장기적인 지역의 민주화를 위해 (3당합당으로 멸실된)야당의 재건과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는 사람이 필요함을 공감하고 민주당 김해시군지구당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3.
91년에 김해시군 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하셨더군요. 고 노무현 대통령 추천으로 정치를 시작하셨다고 되어있는데, 노 전 대통령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정치를 결심하시게 된 계기와 이유는요?

 


- 노무현대통령은 1946년 개띠, 집안에서 누나와 두 명의 형님을 둔 막내이네요. 저와는 개띠 띠동갑,(12살 차이) 누나와 두 명의 형을 둔 막내라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대개 막내들이 집안의 위치상 집안걱정보다는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도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닮은 듯 하네요.
노 대통령은 당시 국회의원으로서 1991년 당시 선거구는 부산이지만 고향은 김해로 김해민주청년회에 오셔서 강의도 해주시는 분으로 알게 되었는데, 김해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저를 보시고 야당이 없어지는 희한한 3당야합의 판에 야당을 복구하고 지역의 민주화를 꾸준히 이끌고 가기 위해서 야당 대표가 필요함을 역설하시면서 지구당 위원장을 권유하셨고, 이 권유를 받아들여 제 인생에 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정당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계기로 현실정치에 몸담게된 저의 생각은 ‘아무리 좋은 이론과 주장도 현실정치 속에서 대중과 함께 실현되지않으면 허무한 공론에 불과하다. 즉 저자거리의 서민과 노동현장의 민중과 함께 나아가지않으면 의미없다’ 는 생각입니다. 그런 소신으로 현실정치, 대중정치의 길에 뛰어들어서 지금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
대학 공부는 중단하셨지만 방송통신대, 경남대 북한대학원, 동국대 박사과정 등 이후에 공부를 많이 하셨더군요. 어떻게 짬짬이 시간을 내셨는지.. 그 많은 공부를 하신 이유와 그 과정에서 얻으신 것은 무엇인가요?

 


- 1983년에 대학으로부터 복학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을 때 저는 한창 지역활동을 하고 있었고 동년 3월에 결혼을 하여 신혼 상태인데 (당시는 교통이 좋질 않아서 일주일에 한두 번 김해와 수원을 오가며 학교다닌다는 생각을 할 상황이 못되었고)다 중단하고 수원으로 올라가서 학교를 다닐 수는 없다고 판단되어 안 다닌다고 학교에 통보를 하였습니다.

 


그래놓고 그때 입학한 것이 방송통신대학교였는데, 경제학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아는데 도움을 받자는 생각으로 경제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선거 등을 하다보니 휴학을 많이 해서 1995년에 졸업, 결국 12년만에 졸업하였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지식과 교양을 습득하기 위해 공부는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던 중 1998년초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이라는 북한 전문대학원이 생겼는데, 1997년 12월에 김대중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경남대학교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때 저는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모순과 질곡이 남북분단이라는 생각이라 이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기로 하고, 3년간을 토요일만 되면 새벽같이 김해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의 삼청동 북한 대학원 캠퍼스에 가서 수업하고 밤차타고 내려오며 공부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참 좋은 선택이었고, 힘들었지만 당시의 교수(뒤에 통일부장관이 된 사람도 있었네요), 학생 등이 참 좋은 인연을 맺는 좋은 시간이요 기회였습니다. 이후 그때 받은 석사학위로 인제대학교 통일학부의 겸임교수를 2005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북한학, 통일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 2008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북한학과가 설립된 (1993년) 동국대학교의 대학원 북한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2012년 까지 과정을 수료하고 지금은 논문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선거가 자주 있으니 당장에 박사논문은 쓰기 어렵겠지만 저는 항상 자신의 앞날을 새롭게 개척하고 인생과 활동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
경기도 교육청에서도 일하시고 지역에서도 교육 관련한 활동을 많이 하셨네요.. 특별히 교육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교육 영역에서 선배님이 중점을 두고 활동하신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나아가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문제점이나 개선해야 할 방향도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선배님이 꿈꾸시는 이상적인 교육 제도는 어떤 것인지 등..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신 내용과 이력 등도 간단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 제가 교육과의 인연이 깊네요.
평소에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몸을 담아서 일하게 된 계기는 2002년도의 경상남도교육위원으로 피선된 일입니다.
그것도 2000년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0년에 둘째 아들이 제 모교에서 초등 2학년으로 다니고 있는데 학기초에 학교에서 학부모로서 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 분위기나 보자는 생각으로 갔다가 학교운영위원장을 맡게되고, 김해지역의 학교운영위원장협의회의 사무국장을 맡게되어 김해의 학교운영위원들을 모아서 교육과 학교운영에 대해 공부하고 견학도 다니는 활동을 재미있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2년 후인 2002년 7월에 경상남도교육위원 선거가 다가오자 수년간 활동해왔던 참교육학부모회에서도 조직후보를 내자는 제안이 있고 지역의 운영위원장들끼리도 학교 교장 출신이 70% 이상인 교육위원회에 우리들 학부모 출신을 보내는 요청도 있고 해서 제4대 경상남도교육위원회 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이 시기가 그 전 1992년 1996년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난 뒤인데, 도교육위원은 정당이 없는 선거이고 학교운영위원들이 선거하는 간접선거인데, 후보자 중 교육장 출신이 2명이나 있고 현역 교육위원이 2명이나 있는 선거에서 2위로(2인을 선출함) 당선되었습니다. 제가 지는 선거, 즉 시작할 때부터 일반인들이 낙선할 것으로 짐작이 되는 선거(당시 1990년대의 영남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선거를 한다는 것은 시작부터 아예 지는 선거라고 대중들이 생각함)를 두 번 치르고 난 뒤 교육위원 선거를 해보니 그렇게 반응이 좋을 수 없었지요. 앞의 두 선거에 비하면 그저 그냥 자동적으로 당선되는 듯한 선거였습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와주고 사람 모아주고 지지표명을 하는 식이였지요. 이렇게 되어 4년간 교육위원으로 교육기관에서 일하고 나니 교육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이루어졌는데, 많이 느끼게 된 것은 교육 자체가 가장 철저하게 정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배자는 자신의 지배를 지속 확대하고자 필히 지배자의 구미에 맞는 내용으로 교육을 하게 되고,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러한 교육을 반대하게 되며, 미래를 위한 교육관을 가진 사람들은 미래를 위한 교육을 이루기 위해 교육운동과 사회운동, 정치활동으로 추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치적 성격을 가진 교육문제이므로, 교육감 선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며, 노무현정부시절에 직선제로 전환된 교육감선거를 독재정권은 아예 없애려고도 하지요.
이렇게 교육과 맺어진 인연이 저를 성장하게도 하고 더 많은 경험을 하게 하였습니다. 2006년도 교육위원 임기를 마칠 저음에 저는 김해시장의 꿈을 갖고 당시 열린우리당의 후보가 되기 위해 시장 후보 예선에 뛰어들었으나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게 정치공백기가 찾아오는가 했는데 얼마 안있어서 경상남도교육감의 직선보궐선거(2007년 12월)가 있었는데, 저는 이 선거에서 그 동안의 경험과 교육계의 기반을 인정받아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교육감을 선출하는 측(권정호후보)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서 상대적으로 수구적인 교육감(고영진 당시 현역 교육감)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선봉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학교무상급식을 선거공약의 맨 선두에 내세우도록 했습니다. 권정호후보가 처음에는 머뭇거렸으나 결국 이 공약의 위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 때 저는 350만 명이 사는 경상남도라는 상당히 큰 단위의 선거를 총 지휘하고 경상남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거리 연설로써 상대방 운동원들과 도민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우리 운동원들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는 저로서는 대단히 성공적인 선거운동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교육계 내에서 선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때의 소문을 알고 있었지요. 누구도 이기리라고 예측 못했던 선거를 뒤집어서 바꾼 주역으로 저를 기억했습니다. 그랬던 덕으로 저는 1년 후인 2009년 4월의 경기도교육감 보궐선거에 발탁되었습니다. 당시 경기도교육감 선거는 지방과는 달리 수도권이라 전국적 중요성을 갖고 있어서 이 선거를 둘러싸고 교육단체 등 시민사회가 꼭 이겨야하겠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지요. (다행히 이 교육감 보궐선거의 승리를 계기로 이명박대통령 시기의 모든 보궐선거에서 야당이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제게 연락이 온 겁니다. 일반선거와 교육계의 선거를 다 해보았으며, 1년 전의 경상남도교육감 선거에서 놀라운 승리를 이끌어낸 저의 경험을 보고 발탁시킨 것이지요. 저는 그 때 지금은 교육부장관이 된 김상곤후보와 함께 1,200만명이 사는 경기도지역을 유세와 선거운동으로 곳곳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제까지의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연설하고 다니는 곳마다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반응, 거기에 답하는 온 거리를 울려대었던 저의 짱짱한 연설! 참 좋은 시기였지요. 그 바람에 저는 김상곤 교육감의 인정을 받아서 2010년부터 경기도교육청 대외협력관으로 특채되어 생각지 못했던 공무원이 되어서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였습니다.
2014년에는 김상곤교육감께서 갑작스럽게 경기도지사로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새로운 유력후보를 찾아나서서 이재정 현교육감을 영입시켜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지요. 돌이켜보면 2007년부터 2014년 8년 동안 4번의 교육감 선거(경남 1회, 경기 3회)를 줄곧 승리로 이끌었던 대한민국 최초의 기록을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경기도교육청에서 처음 실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혁신교육을 대단히 소중하고 중대한 우리나라 교육의 개척지라고 생각합니다. 광복 이후 우리 교육은 분단과 독재라는 질곡이 그 교내용과 방법을 결정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외세와 정치권력은 우리 민중을, 아이들을 독재와 반공과 외세에 길들여서 일하는 기계로 만들려는 내용과 방법으로 교육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육이 그래선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한 반발과 새로운 교육운동을 하였지요. 전교조운동, 대안학교운동, 참교육학부모운동 등이 그것이지요. 2009년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당선은 그런 움직임이 제도권을 점령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루우진 2010년과 2014년 두 번의 선거를 통해서 진보교육감이 전국 17개 시도에서 대전, 울산, 경북, 대구를 제외한 13개 시도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지요. 2009년 경기도교육청의 구호가 “더불어 살아가는 창의적인 민주시민 육성” 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자주자립적인’ 이란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상적인 교육이란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공동체생활을 하는(더불어살아가는) 창의적이고 자주자립적인 민주시민으로 키우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교육은 미래 세대를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현 세대인 청장노년 등 모든 사람들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생활, 자주자립적 생활, 민주적인 시민의식과 생활, 현실에 적응하고 개척할 자질과 교양과 기술, 이게 다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교육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6.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 출마하셨고 경상남도교육위원(2002-2006)을 하시고 교육청공무원을 거쳐서 결국 시의원이 되셨네요. 기초의원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지역의 풀뿌리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셔서인가요? 시민단체 활동을 하셨던 경험이 영향을 끼치셨을 것도 같습니다.

 


- 그렇지요. 저는 20-30대 시절엔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 시민단체활동을 했고, 30-40대에는 정당정치활동, 40-50대에는 교육계에서의 활동을 하고 이제 60살이 되어 기초의원이 되었습니다. 

 
고 노무현대통령께서 생존시에 후배들에게 “내가 부산시 구의원에 나가서 기초의원활동을 하면 안될까?” 하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은 기초의원으로서의 의정활동이 지역주민의 생활과 의식을 민주적으로 형성하는 데에 가장 필요하고, 그것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기초의원은 주민의 생활에 밀착된 활동을 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지요. 동네의 사사로운 일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고 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의정활동, 즉 국회의원의 활동보다 장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동네 앞 개울에 다리가 없어서 주민이 불편하다고 하면 그 현장을 보고 기초자치단체인 시,군이나 구청에 요청하고 예산을 잡아서 설치할 수도 있고, 구청이나 동주민자치센터의 행정업무가 억울하거나 불공정한 일이 있다고 하면 바로 달려가서 시정을 촉구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김해시의 기초 지방자치의 현실은 그러기엔 구역이 넓고 인구가 많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 등은 기초의원의 활동선거구가 평균 8,000명 선이랍니다. 거기에 비하면 제 선거구의 인구는 7만 명입니다. 너무 많죠?) 그래도 중앙정부에 대한 감시견제 등의 일을 해야 하는 국회의원에 비하면 지역주민의 생활상의 직접적 요구를 해결할 소지가 많이 잇다는 점에서는 생활정치로서의 장점이 있지요. 국회의원도 나름의 중요성이 있고요, 지방의원도 나름의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상하가 있거나 중요성의 차이가 있다는 식으로 보는 분들이 많이 있고, 실제 사회적으로 그렇게 대우하지만, 각기 나름의 중요성을 갖고 잇다는 생각입니다. 단 활동하는 과정에서 제도적인 대우의 차이가 있어서 불공정성을 느낍니다. 국회의원은 비서 및 보좌진이 9명이고, 후원회를 만들어서 거기에 실무자를 고용하면 2명 정도는 더 늘어나므로 10명 이상의 비서 및 보좌진을 활용하지만 지방의원은 아예 제도적으로 비서, 보좌관을 둘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후원회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량의 업무를 해야 하는데,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나팔부는 격이어서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못하거나 피곤하여 제대로 소기의 필요한 업무와 활동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은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할 일인데, 그 동안 여러 번 지방의원의 보좌진제도를 청원하거나 후원회설립에 대한 요청과 헌법소원 등도 있었는데, 왜 국회의원들은 지방의원들에 대한 그러한 지원제도를 허용하지 않고 있을까? 지방의원 출신의 국회의원들은 더욱 현실을 잘 알건데도 왜 나서지않을까? 큰 의문이자 심각한 불만입니다.
그리고 지방의원들을 보면 의원이 되기 전에 무엇을 하고 살았느냐 하는 것이 의정활동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대체로 제같이 시민운동 출신들은 시민운동 과정에서 나름 훈련되고 기반을 다져서 의정활동의 중심을 주민이 시정의 주인의 위치가 되도록 하는 일에 두고, 그 활동과정도 주민들과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려 하고 의사소통도 민주적으로 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공무원 출신이나 회사 출신 또는 자영업자 출신 등은 자신이 예전에 했던 습관대로 관료적, 권위적이거나 출세지향적인 행동과 습관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우려스럽습니다. 지방의원에 대한 교육 또는 훈련이 대학이나 지역의 시민단체에서 꾸준하고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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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4월. 김해시의원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후시절 거리선거운동 중이다)
 
 
 
 

7.
지지난해 김상진기념사업회 모임에 오셔서 민주시민교육에 대해 얘기해주셨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해에서도 이와 관련한 활동을 하고 계시다고 했는데 어떤 일인지 소개해주세요. 시의원에 재직하시면서 동시에 시민단체 활동도 병행하시는 건지요?

 


- 예, 우리나라에서의 민주시민교육은 많은 분들이 오랜 동안 노력해왔지요. 그런데 제도권안에서, 소위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예산과 기구를 통해서 민주시민교육을 공식적으로, 제도적으로, 대중적으로 하는 노력은 1987년 유월항쟁 이후 여러 차례 법제화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국회의 다수를 개혁세력이 점했던 기간 자체가 2004년의 극히 짧은 기간 제외하고는 없었으므로 성공하지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시의회의 3/4을 민주당이 점한 2014에 이르러서야 ‘서울시민주시민교육조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조례에 의한 예산이 만들어지고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 1년 후인 2015년초, 그래서 최초로 서울시의 예산이 잡혀서 서울시의 지역대학과 연계한 시민교육의 일환으로 동국대학교 홍윤기교수가 지도한 체계적인 민주시민교육이 2015년 5월부터 9월까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때 80여 명의 지원자들이 몰려서 교육을 받았는데, 저도 많은 서울, 경기지역의 활동가들과 함께 1기 교육 60시간을 받고 제1기 민주시민교육사 예비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다음해에는 경기도와 서울의 각 자치구에서 시민들을 모아서 교육을 실시하고 조례를 만들어갔는데, 성남시가 가장 먼저교육을 하고는 성남시민주시민교육조례를 제정하고, 그 다음 제가 살았던 의정부에서 시민들이 모여서 교육을 하고 단체를 결성하면서 의정부시민주시민교육조례를 제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2015년에는 최초의 수업을 받고, 2016년에는 지역에서 교육을 실시하고 조례를 제정하고, 그리고는 제가 2017년 1월 2일 김해로 이사와서 시의원이 된 뒤에 2017년 10월에 교육을 하여 여기에서 모인 분들로 ‘김해민주시민학교’라는 단체를 결성하였습니다. 곧 2018년 초에 김해시민주시민교육조례를 만들어서 법제화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시민들이 교육을 경험하고 필요를 느껴서 단체를 만들어 조례를 제정하여 법제화하고 확산시키는 과정은 민주시민교육의 주체를 형성, 확대하게 하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중장정부는 중장정부대로 민주시민교육법률을 만들어서 교육을 실시하면서 총괄기관으로 독일의 연방정치교육원같은 민주시민교육원을 설립운영하고, 지방은 지방대로 그러한 총괄지원기관을 만들어서 운영하면서 민주시민교육을 심화확대해갔으면 좋겠습니다. 깨어있는 민주시민을 계속 만들고 성장하도록 지원하고 계기르를 만들어가는 것이 암흑의 시대를 생명을 내던져 갈라내려고 했던 김상진선배님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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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도 서울에서 첫 민주시민교육을 수료하고 홍윤기 동국대철학과 교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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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에서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하고 당시 의정부의회 최경자 의장과 함께)
 

 

 

 

8.
이 인터뷰는 6월 지방선거 출마자분들의 말씀을 들어보기 위한 취지로 기획되었습니다. 5월 장미대선 등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맞았던 작년에 이어 올해 지방선거가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들이 있는데요, 시민운동가이자 시의원으로서 바라보는 작년과 올해 정국의 흐름, 올해 지방선거 전망은 어떻게 보시는지,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소감 등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 2017년은 1987년의 유월항쟁 이후 꼭 30년 만에 미완의 혁명이었던 유월항쟁이 진화하고 발전하여 일정한 완성의 열매를 거둔 세계사에 유례없는 민주평화명예혁명이 이루어진 해입니다. 민중의 손으로 촛불혁명을 일으켜 합법적이고 평화적으로 부패한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정권을 교체하여 개혁적 지도자를 국가수반으로 일하도록 하였으므로, 이제 촛불혁명의 정신으로 이 나라를 개혁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가야 합니다. 그 과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2018년 6월의 지방선거에서 민주개혁세력이 집권하지않으면 안됩니다. 중앙정부가 아무리 민주개혁을 하려해도 지방에서 방해하면 안되고 지방마다 지역마다 민주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며, 도 주민의 생활상의 요구를 들어주고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생활문제에 대한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깨어있는 시민들로 국가가 구성되어 민주주의의 결실과 함께 꾸준한 민주주의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니번 지방선거는 보수세력의 부패와 분열로 인해 역사상 개혁세력에게는 가장 행운의 기회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자칫 오만 하거나 해이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는 것이 정치생물이고 민심이라는 생각이라서, 하늘과 역사가 주신 기회를 한 순간도 헛되이 놓치지않고 최선을 다해서 민주개혁의 소명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이번 선거를 통한 과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도 제 인생 최고의 중요 선거라는 생각으로 전심전력을 다해서 선거에 임할 각오입니다. 

결국 저는 김상진선배님 같은 민주주의의 선구자들에게 진 빚을 인생의 빚으로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면서 저의 인생의 진로가 결정된 것도 김상진선배님과 같은 생명을 바쳐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신 분들의 행동과 신념이 근본 원인이었고, 제가 빚을 갚을 곳도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민주. 민족. 노동열사들의 희생의 빚을 갚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과 자세로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최근 먼저 돌아가신 열사들의 이름이 다 새겨진 ‘열사달력’이 나왔더군요, 그 수많은 열사들의 희생과 가르침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없이 마음을 고쳐잡고 결심들은 하지만 그 희생과 가르침에 많이 못 미쳐서 죄송스럽지요. 그렇지만 항상 노력하면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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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 인터뷰 내용입니다
 

 

 

1.
76년에 대학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시고 감옥에 가게 되고, 끝내 학교에서 제적당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좀 들려주세요. 그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젊은 시절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등등..

- 1976년에 서울농대 원예과에 입학하였는데, 입학할 때에는 제가 농촌 출신이니까 농대를 나와서 우리 농촌과 농민들을 잘 살게 하자는 막연하고 어슬픈 꿈을 꾸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제가 입학했을 1976년 3월은 전 해인 1975년에 김상진선배님 사건으로 인해 농해의 생운동 역량이 많이 파괴되고 난 뒤였는데, 그래도 선배님들이 남아서 한얼, 농사단, 농연(농업문제연구회), 개척농사회 등의 써클을 통해 활동을 하고 있었지요. 그 때 고등학교 선배의 권유로 개척농사회에 가입하여 한국현대사와 농업,농촌문제 등을 학습하면서 고등학교까지와는 다른 현실에 대한 의식이 깨어났다고 기억합니다. 특히 방학때의 농촌활동과 집단숙식과 집중학습 등이 사회와 역사를 보는 눈을 크게 깨우치게 하였고, 점차 학생운동에 나서게 되었던 계기였지요. 그랬다가 1976년 1학기의 어느 날(5월로 기억함, 자료를 찾으면 나올겁니다.)에 75학번 선배들(이병호, 권오훈, 신언관 선배)이 수원 농대캠퍼스에서 반유신, 반박정희정부시위를 시작하였고, 그 때 선배들의 지휘에 따라 학우들을 선동하고 모으는 행동대 역할을 했다가 경찰이 찍은 사진 등의 수사결과 발각나서 무기정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운없이(?) 그 시기에 일어났던 서울 종로에서의 서울지역 대학 연합시위에서 나온 유인물을 기숙사와 학교근처 농대생들 하숙집 등에서 돌려보고 하던 중 어느 학생이 감격해서 부산대학교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산대학교 학과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는데 당시의 현실로서는 서울대에서 온 편지가 검열당할 수 밖에 없었고, 당연히 부산대에서부터 거꾸로 추적된 소위 ‘서울농대 편지사건’ 의 수사에 걸려 책임자로 검거되었지요. 당시에 이렇다할 마음의 준비없이 검거되었던 숫자가 꽤 되었던(10명 이상) 후배학우들은 처음에는 모조리 수원경찰서에 잡혀갔다가 한 달 여쯤 고생하고는 훈방으로부터 유기정학 등의 피해를 입었지요. 뒤에 저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 재판을 받아서(박재순, 이주영후배입니다.) 저 외의 두 사람은 재판이 진행된 약 6개월을 수원교도소, 영등포교도소등을 끌려다니면서 수감생활을 한 끝에 당시 대통령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징역1년에 집행유예를 받았고, 저는 1년 징역형을 확정받았지요.
학교에서는 우리 세 사람을 다 제적시켰다가 뒤에 두 사람은 복학시켰습니다. (박재순후배는 임산가공학과를 졸업하였고 현재는 청주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주영후배는 축산과를 졸업하여 고향 충북 오창에서 농장을 경영하다가 안타깝게도 병을 얻어 2014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저는 1983년에 복학 연락을 학교로부터 받았지만 지역활동하느라 복학을 안했으며 뒤에 2006년에 명예졸업을 하였습니다.)
결국 이러한 학생시절의 민주화운동과 구속수감, 제적이 제 인생의 좌표와 운명을 결정한 것이지요. 이후 40여 년간 하는 일은 변하더라도 줄곧 우리사회의 민주화라는 길을 계속 걷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정신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체 있는 행동’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물론 정신이 있어야 제대로 된 행동이 있겠지만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행동이지요. (상당 경우 정신없이 이루어진 행동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수도 있지요.)정신 내지 생각은 행동으로 나타나지않으면 현실에서는 미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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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학교에서 제적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셨다고 하셨지요. 어떤 계기로 어떤 농사를 지으셨는지.. 그리고 농사일과 함께 지역 단체 일을 병행하셨을 텐데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요?

 
- 농대에 들어갈 때부터 고향인 농촌을 생각한 마음이 있고, 개척농사회라는 써클의 이념 중의 하나가 농업을 실천하는 부분이 있은 데다가 만 2년6개월 정도이지만 원예학과에서 공부했고, 그리고 무엇보다 ‘민중속으로’ 라는 뜻으로 1980년부터 1983년까지 고향 김해 농촌(김해시 주촌면 내삼리)에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논(벼)농사, 밭농사, 축산도 조금씩 하는 식으로 하였는데, 처음에는 서투르기만 한 농사일로 주위의 우스개가 되었는데, 마음을 다잡고 3년간 하니 상일꾼(일을 능숙히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런데 3년간의 농사일은 개인적으로 농사에 종사하여 남들같이 일을 해내는 경험은 되었지만 김해지역의 농업 농촌사회에 정착하거나 농민의 권익을 위한 운동을 하는 선에는 못 미쳤습니다. 그리고 당시 부산지역에서의 시민운동, 재야운동인 양서조합과 부산민주시민협의회(1983년 송기인, 노무현, 문재인변호사 등이 창립주역)에서 하는 활동에 가담하여 부산을 자주 가면서 김해의 부모님과 사는 집으로 이사하는 것으로 종료되었습니다.

이때 부산에서의 1983년은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중심으로 반독재민주화운동이 조금씩 뿌리가 내리기 시작하였고, 저는 이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활동에 참여하여 부산에 자주 가면서 김해에서는 후배들과 함께 ‘김해대학생연합학우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김해지역의 문화를 위해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하나도 없던 도서관을 건립하자, 유신때 중단된 지역 축제인 가락문화제를 부활시키자 등의 문화운동을 시민들 속에서 전개하여 수백여 명의 대학생들이 캠페인을 벌였고, 여기서 모인 힘을 가지고 ‘김해의 미래를 위한 시민토론회’를 벌여서 기관장들을 모아놓고 수백명 규모의 행사를 벌여 김해경찰서 정보과 직원들을 긴장시켰던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때 김해대학생들이라는 후배들 속에서 학생 신분이 나닌 저는 이른바 ‘자문위원’이라는 직책으로 후배들과 함게 활동하여 소위 반정부운동하다 긴급조치9호 위반으로 잘려나온 사람도 이렇게 지역에서 대중적인 활동을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때의 성과가 사회적으로는 도서관의 건립, 가락문화제의 부활 등이 있었지만 저 개인으로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중적인 활동을 전개한 소증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그랬다가 6월 항쟁의 시기가 된 거지요. 전두환독재가 점차 발악적인 상황으로 가서 1987년이 되자 부산, 창원, 마산 등에서 6월항쟁의 깃발이 나부겼능 때 저는 6월 항쟁의 부산 지도부인 민주헌법국민운동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 (위원장 노무현)이 되어서 부산의 민주화투쟁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때 김해에서의 민주화시위는 인제대학교 총학생회가 이끈 학생들이 선도적으로 나섰는데 여기에도 동참하는 등 저의 당시 활동의 주무대는 부산이었지만 김해지역의 상황도 챙기고 동참하였습니다.
   
6월 항쟁 이후 저는 달라진 지형의 김해를 생각하여 김해지역에 주력하여 김해지역 민주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과 김해민주청년회장으로 활동하여 지역민주화에 전념하였습니다. 각종 집회의 진행과 참여, 대외교섭 등으로 바빴던 시기인 1991년 초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의원께서 고향 김해의 민주당 깃발을 저에게 꽂으라고 하신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때 활동했던 분들과 의논한 결과 장기적인 지역의 민주화를 위해 (3당합당으로 멸실된)야당의 재건과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는 사람이 필요함을 공감하고 민주당 김해시군지구당위원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3.
91년에 김해시군 지구당 위원장을 맡으며 정계에 입문하셨더군요. 고 노무현 대통령 추천으로 정치를 시작하셨다고 되어있는데, 노 전 대통령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 에피소드가 있으신가요? 정치를 결심하시게 된 계기와 이유는요?

 


- 노무현대통령은 1946년 개띠, 집안에서 누나와 두 명의 형님을 둔 막내이네요. 저와는 개띠 띠동갑,(12살 차이) 누나와 두 명의 형을 둔 막내라는 점에서는 일치합니다. 대개 막내들이 집안의 위치상 집안걱정보다는 자신의 야심을 실현하기 위해 도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도 닮은 듯 하네요.
노 대통령은 당시 국회의원으로서 1991년 당시 선거구는 부산이지만 고향은 김해로 김해민주청년회에 오셔서 강의도 해주시는 분으로 알게 되었는데, 김해에서 활동을 하고 있는 저를 보시고 야당이 없어지는 희한한 3당야합의 판에 야당을 복구하고 지역의 민주화를 꾸준히 이끌고 가기 위해서 야당 대표가 필요함을 역설하시면서 지구당 위원장을 권유하셨고, 이 권유를 받아들여 제 인생에 전에는 생각하지 않았던 정당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계기로 현실정치에 몸담게된 저의 생각은 ‘아무리 좋은 이론과 주장도 현실정치 속에서 대중과 함께 실현되지않으면 허무한 공론에 불과하다. 즉 저자거리의 서민과 노동현장의 민중과 함께 나아가지않으면 의미없다’ 는 생각입니다. 그런 소신으로 현실정치, 대중정치의 길에 뛰어들어서 지금도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4.
대학 공부는 중단하셨지만 방송통신대, 경남대 북한대학원, 동국대 박사과정 등 이후에 공부를 많이 하셨더군요. 어떻게 짬짬이 시간을 내셨는지.. 그 많은 공부를 하신 이유와 그 과정에서 얻으신 것은 무엇인가요?

 


- 1983년에 대학으로부터 복학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을 때 저는 한창 지역활동을 하고 있었고 동년 3월에 결혼을 하여 신혼 상태인데 (당시는 교통이 좋질 않아서 일주일에 한두 번 김해와 수원을 오가며 학교다닌다는 생각을 할 상황이 못되었고)다 중단하고 수원으로 올라가서 학교를 다닐 수는 없다고 판단되어 안 다닌다고 학교에 통보를 하였습니다.

 


그래놓고 그때 입학한 것이 방송통신대학교였는데, 경제학을 통해서 우리 사회를 아는데 도움을 받자는 생각으로 경제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후 선거 등을 하다보니 휴학을 많이 해서 1995년에 졸업, 결국 12년만에 졸업하였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필요한 지식과 교양을 습득하기 위해 공부는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던 중 1998년초에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이라는 북한 전문대학원이 생겼는데, 1997년 12월에 김대중대통령이 당선되자마자 경남대학교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이 때 저는 우리사회의 가장 중요한 모순과 질곡이 남북분단이라는 생각이라 이 대학원에 가서 공부하기로 하고, 3년간을 토요일만 되면 새벽같이 김해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의 삼청동 북한 대학원 캠퍼스에 가서 수업하고 밤차타고 내려오며 공부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참 좋은 선택이었고, 힘들었지만 당시의 교수(뒤에 통일부장관이 된 사람도 있었네요), 학생 등이 참 좋은 인연을 맺는 좋은 시간이요 기회였습니다. 이후 그때 받은 석사학위로 인제대학교 통일학부의 겸임교수를 2005년부터 2010년까지 6년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북한학, 통일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서 2008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북한학과가 설립된 (1993년) 동국대학교의 대학원 북한학과 박사과정에 진학하여 2012년 까지 과정을 수료하고 지금은 논문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선거가 자주 있으니 당장에 박사논문은 쓰기 어렵겠지만 저는 항상 자신의 앞날을 새롭게 개척하고 인생과 활동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평생 배우고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5.
경기도 교육청에서도 일하시고 지역에서도 교육 관련한 활동을 많이 하셨네요.. 특별히 교육 분야에 관심을 가지게 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교육 영역에서 선배님이 중점을 두고 활동하신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나아가 우리나라 교육제도의 문제점이나 개선해야 할 방향도 짚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선배님이 꿈꾸시는 이상적인 교육 제도는 어떤 것인지 등.. (교육 분야에서 활동하신 내용과 이력 등도 간단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 제가 교육과의 인연이 깊네요.
평소에 교육이 중요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몸을 담아서 일하게 된 계기는 2002년도의 경상남도교육위원으로 피선된 일입니다.
그것도 2000년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0년에 둘째 아들이 제 모교에서 초등 2학년으로 다니고 있는데 학기초에 학교에서 학부모로서 오라는 겁니다. 그래서 학교 분위기나 보자는 생각으로 갔다가 학교운영위원장을 맡게되고, 김해지역의 학교운영위원장협의회의 사무국장을 맡게되어 김해의 학교운영위원들을 모아서 교육과 학교운영에 대해 공부하고 견학도 다니는 활동을 재미있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2년 후인 2002년 7월에 경상남도교육위원 선거가 다가오자 수년간 활동해왔던 참교육학부모회에서도 조직후보를 내자는 제안이 있고 지역의 운영위원장들끼리도 학교 교장 출신이 70% 이상인 교육위원회에 우리들 학부모 출신을 보내는 요청도 있고 해서 제4대 경상남도교육위원회 선거에 출마하였습니다. 이 시기가 그 전 1992년 1996년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고 난 뒤인데, 도교육위원은 정당이 없는 선거이고 학교운영위원들이 선거하는 간접선거인데, 후보자 중 교육장 출신이 2명이나 있고 현역 교육위원이 2명이나 있는 선거에서 2위로(2인을 선출함) 당선되었습니다. 제가 지는 선거, 즉 시작할 때부터 일반인들이 낙선할 것으로 짐작이 되는 선거(당시 1990년대의 영남에서 민주당 간판으로 선거를 한다는 것은 시작부터 아예 지는 선거라고 대중들이 생각함)를 두 번 치르고 난 뒤 교육위원 선거를 해보니 그렇게 반응이 좋을 수 없었지요. 앞의 두 선거에 비하면 그저 그냥 자동적으로 당선되는 듯한 선거였습니다. 도처에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도와주고 사람 모아주고 지지표명을 하는 식이였지요. 이렇게 되어 4년간 교육위원으로 교육기관에서 일하고 나니 교육에 대한 관심과 공부가 이루어졌는데, 많이 느끼게 된 것은 교육 자체가 가장 철저하게 정치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배자는 자신의 지배를 지속 확대하고자 필히 지배자의 구미에 맞는 내용으로 교육을 하게 되고, 독재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러한 교육을 반대하게 되며, 미래를 위한 교육관을 가진 사람들은 미래를 위한 교육을 이루기 위해 교육운동과 사회운동, 정치활동으로 추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치적 성격을 가진 교육문제이므로, 교육감 선거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 되며, 노무현정부시절에 직선제로 전환된 교육감선거를 독재정권은 아예 없애려고도 하지요.
이렇게 교육과 맺어진 인연이 저를 성장하게도 하고 더 많은 경험을 하게 하였습니다. 2006년도 교육위원 임기를 마칠 저음에 저는 김해시장의 꿈을 갖고 당시 열린우리당의 후보가 되기 위해 시장 후보 예선에 뛰어들었으나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게 정치공백기가 찾아오는가 했는데 얼마 안있어서 경상남도교육감의 직선보궐선거(2007년 12월)가 있었는데, 저는 이 선거에서 그 동안의 경험과 교육계의 기반을 인정받아서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교육감을 선출하는 측(권정호후보)의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서 상대적으로 수구적인 교육감(고영진 당시 현역 교육감)을 상대로 치열한 경쟁을 치르는 선봉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때 학교무상급식을 선거공약의 맨 선두에 내세우도록 했습니다. 권정호후보가 처음에는 머뭇거렸으나 결국 이 공약의 위력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이 때 저는 350만 명이 사는 경상남도라는 상당히 큰 단위의 선거를 총 지휘하고 경상남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거리 연설로써 상대방 운동원들과 도민들에게 박수를 받으며 우리 운동원들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는 저로서는 대단히 성공적인 선거운동의 경험을 하였습니다. 교육계 내에서 선거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이 때의 소문을 알고 있었지요. 누구도 이기리라고 예측 못했던 선거를 뒤집어서 바꾼 주역으로 저를 기억했습니다. 그랬던 덕으로 저는 1년 후인 2009년 4월의 경기도교육감 보궐선거에 발탁되었습니다. 당시 경기도교육감 선거는 지방과는 달리 수도권이라 전국적 중요성을 갖고 있어서 이 선거를 둘러싸고 교육단체 등 시민사회가 꼭 이겨야하겠다고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지요. (다행히 이 교육감 보궐선거의 승리를 계기로 이명박대통령 시기의 모든 보궐선거에서 야당이 승리를 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제게 연락이 온 겁니다. 일반선거와 교육계의 선거를 다 해보았으며, 1년 전의 경상남도교육감 선거에서 놀라운 승리를 이끌어낸 저의 경험을 보고 발탁시킨 것이지요. 저는 그 때 지금은 교육부장관이 된 김상곤후보와 함께 1,200만명이 사는 경기도지역을 유세와 선거운동으로 곳곳을 누비고 다녔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제까지의 제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연설하고 다니는 곳마다 주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반응, 거기에 답하는 온 거리를 울려대었던 저의 짱짱한 연설! 참 좋은 시기였지요. 그 바람에 저는 김상곤 교육감의 인정을 받아서 2010년부터 경기도교육청 대외협력관으로 특채되어 생각지 못했던 공무원이 되어서 월급을 받으면서 일하였습니다.
2014년에는 김상곤교육감께서 갑작스럽게 경기도지사로 방향을 바꾸는 바람에 새로운 유력후보를 찾아나서서 이재정 현교육감을 영입시켜 선거를 승리로 이끌었지요. 돌이켜보면 2007년부터 2014년 8년 동안 4번의 교육감 선거(경남 1회, 경기 3회)를 줄곧 승리로 이끌었던 대한민국 최초의 기록을 만들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저는 경기도교육청에서 처음 실시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혁신교육을 대단히 소중하고 중대한 우리나라 교육의 개척지라고 생각합니다. 광복 이후 우리 교육은 분단과 독재라는 질곡이 그 교내용과 방법을 결정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외세와 정치권력은 우리 민중을, 아이들을 독재와 반공과 외세에 길들여서 일하는 기계로 만들려는 내용과 방법으로 교육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육이 그래선 안된다는 생각을 가진 많은 분들이 이에 대한 반발과 새로운 교육운동을 하였지요. 전교조운동, 대안학교운동, 참교육학부모운동 등이 그것이지요. 2009년 김상곤 경기도교육감의 당선은 그런 움직임이 제도권을 점령한 최초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루우진 2010년과 2014년 두 번의 선거를 통해서 진보교육감이 전국 17개 시도에서 대전, 울산, 경북, 대구를 제외한 13개 시도를 석권하는 기염을 토했지요. 2009년 경기도교육청의 구호가 “더불어 살아가는 창의적인 민주시민 육성” 이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자주자립적인’ 이란 말을 덧붙이고 싶습니다. 이상적인 교육이란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을 공동체생활을 하는(더불어살아가는) 창의적이고 자주자립적인 민주시민으로 키우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그리고 교육은 미래 세대를 키우는 것만이 아니라, 현 세대인 청장노년 등 모든 사람들에게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생활, 자주자립적 생활, 민주적인 시민의식과 생활, 현실에 적응하고 개척할 자질과 교양과 기술, 이게 다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러한 교육이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6.
국회의원 선거에 두 번 출마하셨고 경상남도교육위원(2002-2006)을 하시고 교육청공무원을 거쳐서 결국 시의원이 되셨네요. 기초의원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은 지역의 풀뿌리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셔서인가요? 시민단체 활동을 하셨던 경험이 영향을 끼치셨을 것도 같습니다.

 


- 그렇지요. 저는 20-30대 시절엔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 시민단체활동을 했고, 30-40대에는 정당정치활동, 40-50대에는 교육계에서의 활동을 하고 이제 60살이 되어 기초의원이 되었습니다. 

 
고 노무현대통령께서 생존시에 후배들에게 “내가 부산시 구의원에 나가서 기초의원활동을 하면 안될까?” 하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고 합니다. 그 말씀은 기초의원으로서의 의정활동이 지역주민의 생활과 의식을 민주적으로 형성하는 데에 가장 필요하고, 그것이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기초의원은 주민의 생활에 밀착된 활동을 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지요. 동네의 사사로운 일까지도 들여다 볼 수 있고 개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의정활동, 즉 국회의원의 활동보다 장점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동네 앞 개울에 다리가 없어서 주민이 불편하다고 하면 그 현장을 보고 기초자치단체인 시,군이나 구청에 요청하고 예산을 잡아서 설치할 수도 있고, 구청이나 동주민자치센터의 행정업무가 억울하거나 불공정한 일이 있다고 하면 바로 달려가서 시정을 촉구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김해시의 기초 지방자치의 현실은 그러기엔 구역이 넓고 인구가 많다는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일본 등은 기초의원의 활동선거구가 평균 8,000명 선이랍니다. 거기에 비하면 제 선거구의 인구는 7만 명입니다. 너무 많죠?) 그래도 중앙정부에 대한 감시견제 등의 일을 해야 하는 국회의원에 비하면 지역주민의 생활상의 직접적 요구를 해결할 소지가 많이 잇다는 점에서는 생활정치로서의 장점이 있지요. 국회의원도 나름의 중요성이 있고요, 지방의원도 나름의 중요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상하가 있거나 중요성의 차이가 있다는 식으로 보는 분들이 많이 있고, 실제 사회적으로 그렇게 대우하지만, 각기 나름의 중요성을 갖고 잇다는 생각입니다. 단 활동하는 과정에서 제도적인 대우의 차이가 있어서 불공정성을 느낍니다. 국회의원은 비서 및 보좌진이 9명이고, 후원회를 만들어서 거기에 실무자를 고용하면 2명 정도는 더 늘어나므로 10명 이상의 비서 및 보좌진을 활용하지만 지방의원은 아예 제도적으로 비서, 보좌관을 둘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후원회도 불가능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분량의 업무를 해야 하는데,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나팔부는 격이어서 시간이 부족해서 제대로 못하거나 피곤하여 제대로 소기의 필요한 업무와 활동을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은 제도적으로 보완해야 할 일인데, 그 동안 여러 번 지방의원의 보좌진제도를 청원하거나 후원회설립에 대한 요청과 헌법소원 등도 있었는데, 왜 국회의원들은 지방의원들에 대한 그러한 지원제도를 허용하지 않고 있을까? 지방의원 출신의 국회의원들은 더욱 현실을 잘 알건데도 왜 나서지않을까? 큰 의문이자 심각한 불만입니다.
그리고 지방의원들을 보면 의원이 되기 전에 무엇을 하고 살았느냐 하는 것이 의정활동의 성격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데, 대체로 제같이 시민운동 출신들은 시민운동 과정에서 나름 훈련되고 기반을 다져서 의정활동의 중심을 주민이 시정의 주인의 위치가 되도록 하는 일에 두고, 그 활동과정도 주민들과 민주적인 관계를 만들려 하고 의사소통도 민주적으로 하려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공무원 출신이나 회사 출신 또는 자영업자 출신 등은 자신이 예전에 했던 습관대로 관료적, 권위적이거나 출세지향적인 행동과 습관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서 우려스럽습니다. 지방의원에 대한 교육 또는 훈련이 대학이나 지역의 시민단체에서 꾸준하고 권위를 인정받으면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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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4월. 김해시의원 보궐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후시절 거리선거운동 중이다)
 
 
 
 

7.
지지난해 김상진기념사업회 모임에 오셔서 민주시민교육에 대해 얘기해주셨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김해에서도 이와 관련한 활동을 하고 계시다고 했는데 어떤 일인지 소개해주세요. 시의원에 재직하시면서 동시에 시민단체 활동도 병행하시는 건지요?

 


- 예, 우리나라에서의 민주시민교육은 많은 분들이 오랜 동안 노력해왔지요. 그런데 제도권안에서, 소위 중앙정부나 지방정부의 예산과 기구를 통해서 민주시민교육을 공식적으로, 제도적으로, 대중적으로 하는 노력은 1987년 유월항쟁 이후 여러 차례 법제화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국회의 다수를 개혁세력이 점했던 기간 자체가 2004년의 극히 짧은 기간 제외하고는 없었으므로 성공하지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시의회의 3/4을 민주당이 점한 2014에 이르러서야 ‘서울시민주시민교육조례’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 조례에 의한 예산이 만들어지고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이 1년 후인 2015년초, 그래서 최초로 서울시의 예산이 잡혀서 서울시의 지역대학과 연계한 시민교육의 일환으로 동국대학교 홍윤기교수가 지도한 체계적인 민주시민교육이 2015년 5월부터 9월까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때 80여 명의 지원자들이 몰려서 교육을 받았는데, 저도 많은 서울, 경기지역의 활동가들과 함께 1기 교육 60시간을 받고 제1기 민주시민교육사 예비자격증을 받았습니다. 이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그 다음해에는 경기도와 서울의 각 자치구에서 시민들을 모아서 교육을 실시하고 조례를 만들어갔는데, 성남시가 가장 먼저교육을 하고는 성남시민주시민교육조례를 제정하고, 그 다음 제가 살았던 의정부에서 시민들이 모여서 교육을 하고 단체를 결성하면서 의정부시민주시민교육조례를 제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2015년에는 최초의 수업을 받고, 2016년에는 지역에서 교육을 실시하고 조례를 제정하고, 그리고는 제가 2017년 1월 2일 김해로 이사와서 시의원이 된 뒤에 2017년 10월에 교육을 하여 여기에서 모인 분들로 ‘김해민주시민학교’라는 단체를 결성하였습니다. 곧 2018년 초에 김해시민주시민교육조례를 만들어서 법제화할 예정으로 있습니다. 시민들이 교육을 경험하고 필요를 느껴서 단체를 만들어 조례를 제정하여 법제화하고 확산시키는 과정은 민주시민교육의 주체를 형성, 확대하게 하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중장정부는 중장정부대로 민주시민교육법률을 만들어서 교육을 실시하면서 총괄기관으로 독일의 연방정치교육원같은 민주시민교육원을 설립운영하고, 지방은 지방대로 그러한 총괄지원기관을 만들어서 운영하면서 민주시민교육을 심화확대해갔으면 좋겠습니다. 깨어있는 민주시민을 계속 만들고 성장하도록 지원하고 계기르를 만들어가는 것이 암흑의 시대를 생명을 내던져 갈라내려고 했던 김상진선배님의 정신을 계승하는 길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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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도 서울에서 첫 민주시민교육을 수료하고 홍윤기 동국대철학과 교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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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정부에서 민주시민교육을 진행하고 당시 의정부의회 최경자 의장과 함께)
 

 

 

 

8.
이 인터뷰는 6월 지방선거 출마자분들의 말씀을 들어보기 위한 취지로 기획되었습니다. 5월 장미대선 등 정치적으로 큰 변화를 맞았던 작년에 이어 올해 지방선거가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전망들이 있는데요, 시민운동가이자 시의원으로서 바라보는 작년과 올해 정국의 흐름, 올해 지방선거 전망은 어떻게 보시는지, 지방선거에 출마하는 소감 등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 2017년은 1987년의 유월항쟁 이후 꼭 30년 만에 미완의 혁명이었던 유월항쟁이 진화하고 발전하여 일정한 완성의 열매를 거둔 세계사에 유례없는 민주평화명예혁명이 이루어진 해입니다. 민중의 손으로 촛불혁명을 일으켜 합법적이고 평화적으로 부패한 독재자를 끌어내리고 정권을 교체하여 개혁적 지도자를 국가수반으로 일하도록 하였으므로, 이제 촛불혁명의 정신으로 이 나라를 개혁하고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가야 합니다. 그 과업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2018년 6월의 지방선거에서 민주개혁세력이 집권하지않으면 안됩니다. 중앙정부가 아무리 민주개혁을 하려해도 지방에서 방해하면 안되고 지방마다 지역마다 민주개혁이 이루어져야 하며, 도 주민의 생활상의 요구를 들어주고 주민이 체감할 수 있는 생활문제에 대한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져야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깨어있는 시민들로 국가가 구성되어 민주주의의 결실과 함께 꾸준한 민주주의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니번 지방선거는 보수세력의 부패와 분열로 인해 역사상 개혁세력에게는 가장 행운의 기회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자칫 오만 하거나 해이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는 것이 정치생물이고 민심이라는 생각이라서, 하늘과 역사가 주신 기회를 한 순간도 헛되이 놓치지않고 최선을 다해서 민주개혁의 소명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이번 선거를 통한 과업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도 제 인생 최고의 중요 선거라는 생각으로 전심전력을 다해서 선거에 임할 각오입니다. 

결국 저는 김상진선배님 같은 민주주의의 선구자들에게 진 빚을 인생의 빚으로 안고 살아갈 것입니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면서 저의 인생의 진로가 결정된 것도 김상진선배님과 같은 생명을 바쳐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신 분들의 행동과 신념이 근본 원인이었고, 제가 빚을 갚을 곳도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민주. 민족. 노동열사들의 희생의 빚을 갚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신념과 자세로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최근 먼저 돌아가신 열사들의 이름이 다 새겨진 ‘열사달력’이 나왔더군요, 그 수많은 열사들의 희생과 가르침을 외면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없이 마음을 고쳐잡고 결심들은 하지만 그 희생과 가르침에 많이 못 미쳐서 죄송스럽지요. 그렇지만 항상 노력하면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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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감으로 출마하는겨???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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